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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당신이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바에야

[박상진의 문학으로 쓰는 이야기-헉슬리 '멋진 신세계' 외]
유토피아 이야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좋은 세상'
유토피아 추구하는 한 인간은 행복
디스토피아 이야기
'문명의 야만' 세계사적 비극 겪으며
꿈과 모험의 삶 이야기할 기력 잃어
멋진 신세계
과학기술이 전통적 신의 업무 대신
기계에 종속된 우리시대의 자화상
1984
조작된 언어가 인간 통제하고 세뇌
전체주의 감시체제에 순응하는 삶

  • 최성욱 기자
  • 2019-12-13 17:45:56
  • 문화
‘유토피아 이야기’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당신에게서 출발한다. 당신의 이야기에는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들어있다. 이야기는 상상에서 나올 수도 있고 사실의 관찰일 수도 있지만, 그 무엇이든 이야기에는 세상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담겨있다.

언제부턴가 즐거운 이야기가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어릴 때 주변에는 꿈과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어른이 된 어느 시점 문득 그런 이야기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암울한 이야기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작가는 꿈이 사라지고 더이상 아무도 모험을 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를 상상하느라 바빠졌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고, 시대를 그렇게 예언했다.

암울한 시대...당신이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바에야
디스토피아 이미지

유토피아라는 말은 다들 아시듯 ‘없는 좋은 세상’을 의미한다. 좋은 세상이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고, 언젠가는 있을 수도 있으나 장담할 수는 없다. 뭐, 이런 뜻이다. 그 말뜻에 매료된 인간은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유토피아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지금 여기 없지만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한 인간은 행복했다. 죄르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말했던, 별이 저 하늘에 떠 있고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행복이 보장되던 시절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20세기 들어서면서 무너졌다. 공중에 빛나는 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리는 시대가 시작됐다.

암울한 시대...당신이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바에야
‘십오 소년 표류기’ 표지.

어렸을 때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은 책은 ‘십오 소년 표류기’다(줄 베른이 1888년 출판한 ‘2년의 방학’이 원작으로, 1896년 일본어 번역판에서 ‘십오 소년’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표류해 겪는 갖가지 모험 이야기다. 어른 하나 없이 남겨진 상황에서 아이들은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매우 침착하게 살아남는다. 낙관적인 생각과 확신에 찬 행동 덕분에 세상은 그들에게 해피엔딩이 보장된 모험을 벌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 책이 들어있는, 계몽사에서 50권으로 낸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끼고 살았다. 거기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날개로 달아 환상의 세계로 건너가곤 했다. 나는 두 개의 태양 가운데 하나를 쏘아 달로 만들어 세상을 한없는 열기로부터 구해내는 영웅이었고, 이른 아침 풋풋한 건초 더미에서 깨어 차가운 우유를 마시는 어린 방랑자였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곧 유토피아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토피아를 꿈꾸게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뭔가 좋은 세상을 그리워하고 염원했으니까.

‘디스토피아 이야기’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다른 이야기들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집에서 뒹굴고 있던,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한국문학전집’을 멋도 모르고 들척였다. 해방과 전쟁 후의 피폐한 한국 사회를 리얼하게 재현한 이야기에서 질곡을 견디고 살아남는 자의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헉슬리, 오웰, 카프카,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에서도 삶의 근본적인 우울과 비루함을 맛보았다. 나는 수백 년에 걸친 문학의 변화,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건너가는 행보를 단 몇 년 동안 압축해 체험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단지 꿈에 젖은 소년기에서 현실에 눈을 뜨는 청소년기로 건너가는 과정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때 유토피아 이야기는 풍성했다. 근대 이후만 보더라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같은 책들은 유토피아를 매우 상세하게 제시하면서 인간 진보의 방향을 희망차게 제시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과연 말이 되는지, 실현 가능한지의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자. 다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사회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고, 극복의 청사진으로 희망찬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에 비례해 사회는 한순간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낙관적 모습을 보였다.

암울한 시대...당신이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바에야
유토피아 이미지

그러나 20세기 들어 ‘문명의 야만’이라 불린 엄청난 세계사적 비극을 겪으면서 인간은 행복한 이야기를 할 기력을 잃었다. 행복 나부랭이로 꿈과 모험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기에는 눈앞의 현실이 너무나 비참했다. 유토피아의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무지와 둔감으로 덧칠된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앨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가 대표적이다. 이후 지금까지 유토피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거짓된 희망과 무책임한 약속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쉽게 지우기 힘들다.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는 어린이들이 아기 제조 공장을 견학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공장에서는 갓난애들이 이후 자라나 사회에서 담당하게 될 몇 개의 범주로 구분되어 육성된다. ‘멋진 신세계’는 단연 과학기술문명이 몰고 올 암울한 미래를 상상한다. 신기하게도 거의 100년 전의 상상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점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과학기술은 전통적인 신의 업무를 대신하면서 신의 자리를 찬탈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총통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기계나 발달된 의약품이나 보편적 행복과는 양립할 수 없는 걸세. 자네도 선택을 해야 하네. 우리의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택한 것일세.” ‘멋진 신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 신과 기계중에서 기계를 선택해 기계가 주는 행복을 더할 나위 없이 누리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암울한 시대...당신이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바에야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84’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이 기계문명의 유혹에 굴복한다면,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전체주의의 감시 체제에 순응한다. ‘1984’의 세계에서는 조작된 이야기들이 인간을 통제하고 세뇌한다. 주인공 윈스톤이 근무하는 진리부에서는 일사불란한 통제와 용이한 세뇌를 위해 신어사전을 만드는데, 사전의 목표는 기존 언어를 뼈만 남기고 깎아내는 것이다. 언어가 줄어들고 이야기가 권력의 통제를 받으면서 사람들의 내면은 궁핍해져 간다.

어느 날 윈스톤은 함께 근무하는 줄리아로부터 이런 문구가 적힌 쪽지를 받는다. ‘사랑해요 (i love you)’. 문구는 간결하나 함의는 깊다. 문구가 생성하는 가능 세계 속에서 그들은 행복감에 젖는다. 그들에게 유토피아의 문이 빠끔히 열린다. 거기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빛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며 ‘사랑’을 한다. 그들은 감시 카메라를 피해 들녘으로 나간다. “내가 때때로 꿈속에서 보는 경치라오.” 윈스톤이 속삭인다. 그리고 탈주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만의 삶과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실제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단 한 가지 방법인 자살마저도 둘은 실행할 의사가 없다. 미래가 없는 현실에 매달려 사는 것은 공기가 있는 한 허파가 계속 숨을 쉬듯 막을 수 없는 본능 같다. 그들은 체포되고 회유와 협박 끝에 다시 체제에 순응하고 만다. 원래의 자리에 머물고, 움직임과 변화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그들의 언어는 반역의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한다. 목소리는 흩어지고 침묵이 들어선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 쓰고 또 다시 써도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다. 그것은 상상과 변주가 없기에 이야기라 부를 수도 없다. 이야기가 없으니 삶도 없다. 그렇게 그들은 삶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쓰며 즐거워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우리에게 친숙해지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래도 누구나 정원을 가꾸고 저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지펴야 한다. 그것이 윤리적 존재로서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며 임무니까. 그런데 당신이 들려줄 유토피아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이 시대 당신이 다시 쓸 유토피아 이야기는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어쩌면 당신은 디스토피아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를 가늠하기에 앞서 유토피아를 찾아 나선 옛날 어떤 용감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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