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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외칼럼
[오색인문학] '바람 계곡 소녀'의 적은 괴물이 아니다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나우시카와 해오리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애니 처럼

인류의 지속적인 환경 파괴에

생태계 위협 물질·재해 생겨나

엄습 재난에 인간은 미약한 존재

자연과 공존이 지혜로운 길이지만

백로처럼 '발바꾸기' 대응이 대부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지브리스튜디오




그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곤경에 처해 있다. 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됐다고 하니 그나마 한숨을 돌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날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의학, 특히 면역학 관련 글을 접하다 보면 군사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방역도 그렇다. 외부로부터 침입한 적을 퇴치하는 것이 그 분야의 기본 서사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보는 게 현명한 일일까.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바이러스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시시각각 돌연변이체가 생긴다. 인간이 그런 존재와 맞서 최종 승리할 수 있을까. 전염병을 연상시켜서 그렇지, 기실 바이러스도 자연(의 일부)이다. 동양적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은 자연이 승부의 대상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싸움이란 비슷한 수준의 상대끼리 하는 짓거리다. 힘의 현격한 차이가 있을 때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과의 대등한 쟁투, 아무래도 수긍하기 어려운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를 보면 미래의 인류는 ‘부해(腐海)’라는 유독 물질을 내뿜는 거대한 숲과 ‘오무’라는 거대 곤충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부해와 오무가 생겨난 것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지구환경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나우시카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둘의 화해를 도모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원래 나우시카라는 이름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데, 조난 중인 오디세우스에게 도움을 준 공주의 이름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부해와 오무가 인간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하 깊숙이 오염된 물을 자정(自淨)하는 것으로 처리한 장면이다.

필자는 이전에 자연재해의 반복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 반복을 돌파하기, 방어하기, 반복과 하나 되기가 그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자연을 극복 대상 혹은 적으로 규정하고 아예 근절해버리겠다는 태도다. 임시적이고도 본능적인 대처 방식이다. 두 번째 방법은 생태주의적인 제도 장치를 마련하고 인간에게 해가 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방어벽을 쌓아 만일의 사태를 준비하는 태도다. 이 방법도 면역 과잉 반응처럼 자해(自害) 위험이 있고 방어벽이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과 인간의 운명이 상호 의존적이고 재해의 반복이 생사의 리드미컬한 박동임을 깨닫는 것이다. 부해의 자정작용을 알아차린 자연 친화력의 소유자 나우시카처럼 말이다. 이것이 선악의 저편으로 초월해 불안 및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가장 지혜롭지만 습득하기는 가장 어렵다. 이런 종류의 지혜는 고통을 통해서만 온몸으로 취득할 수 있다. 겨우 체득한 소수의 현자도 속절없이 죽기 마련이며 어린(어리석은) 새 세대를 통해서만 인류는 생을 이어가기에 지혜의 전수가 어렵다.

이 세 가지 방법은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새옹지마처럼 장점이 곧 단점을 이룬다. 그래서 어느 하나만 취할 이유는 없다. 그중 세 번째 방법은 너무 막연하고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서 사실 방법이라 명명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적기에 적재적소에 맞춰 처음 두 방법을 번갈아 운용하는 지혜에 가깝다. 거창하게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제시해봤지만 어쩌면 인간 역시 엄습하는 자연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이라는 게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백로


미당 서정주의 시 가운데 ‘한 발 고여 해오리’ 라는 작품이 있다. 여기서 해오리는 왜가릿과의 새, 해오라기 혹은 백로를 가리킨다. 논이나 냇가에서 한 발로 단정히 서 있는 해오라기를 떠올리면 된다. “세상이 두루두루 늦가을 찬물이면/두 발 다 시리게스리 적시고 있어서야 쓰는가?//한 발은 치켜들어 덜 시리게 고였다가/물 속에 시린 발이 아조 저려오거던/바꾸아서 물에 넣고 저린 발 또 고여야지.//아무렴 아무렴 그렇고 말고,/슬기가 별 슬기가 또 어디 있나?”

춘하추동은 반복된다. 생명의 호시절인 춘하만 있는 게 아니라 엄혹한 추동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변화된 환경에 몸뚱이 하나로 적응하는 동물들은 장기 대책 같은 것을 세울 수 없다. 그저 한 발로 섰다가 발을 바꾸는 해오라기처럼 임시변통으로 변화된 자연과 만난다. 고통을 근절하려 하기보다 시공간적으로 고통을 분산시킨다. 시인의 말처럼 호모 사피엔스의 슬기라는 것도 그저 해오라기의 발 바꿔 서는 수준에 불과할 수 있다. 신용카드를 돌려 막거나 친환경 태양광을 설치하려고 벌목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도 해오리와 다른 ‘별 슬기’는 없어 보인다. 다윈 진화론에 기대어 동물과 인간의 연속성을 주장하던 과학자들이 돌연 자연 극복의 대표 주자 노릇을 하는 것도 그런 발 바꾸기다.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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